벼를 기르다 보면, 옆에 가라지가 자라게 되기 마련이다. 가라지는 불필요한 존재이므로, 없애야 함은 마땅하다. 물론 벼의 건강한 성장을 방해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마 친구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벼와같은 친구가 있는 반면에 가라지 같은 친구가 있다. 벼와 같은 친구는 곁에 있는 친구로서, 서로의 도움이 되고 감정도 공유를 한다. 하지만 가라지 같은 친구는 도움이 필요할 때만, 위로가 필요할 때만 접근한다.
전자를 현재의 친구, 후자를 과거의 친구라 칭하고 싶다. 현재의 친구는 나에게 있어 진짜의 친구고 과거의 친구는 친구였었으니 이제는 나에게 의미가 없는 친구일 것이다. 내가 느낀 감정 그리고 과거의 친구가 느끼는 감정 모두 다르겠지만 본인이 진실하다고 느낀다면 주위에 진실한 친구들이 현현할 것이고 아니라면 같은 부류끼리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친구도 그렇고 지인도 마찬가지다. 나와 동행할 사람인가? 나를 이용하는 사람이가? 구별을 하고 벼와 같은 사람을 취하고 가라지 같은 의미 없는 사람은 버림이 마땅하다.
그러나 기독교적 관점에선 그렇지 않을 수 있겠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내가 혼자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보기 싫은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으랴?
많은 생각을 하였다. 그들이 나에게 의미가 없고 심지어 원수가 되었다 치면, 무시하거나 복수해야 함이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이 답은 아닐 것이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결코 서로에게 좋을 것은 없을 것이다. 또한 동물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자극에 대한 반응을 하는 것과 같이, 누가 때리면 으르렁 거리는 것과 같이, 살아갈 것이고 끝없는 분노와 복수의 되풀이될 뿐이다.
기독교에서, 예수는 왜 그토록 신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얻어터지며 죽음을 맞이했는가? 그리고 왜 3일만에 부활하여 제자들 앞에 나타났는가? 사람들의 감정싸움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가 진실로 전하고 싶었던 사랑은 아마도 그 자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부터 시작하여 진정한 행복을 느끼게 하고 싶어서이지 않았을까? 악을 이기기 위해선 선이 앞서야 하고, 본인의 행복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아이들을 위한 수많은 만화들의 결론은 권선징악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아이들보다 못한 삶을 산다는 것 자체가 아이들이 보기에 상당히 부끄러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같다. 자신을 위한 끝없는 싸움과 발전은 물론 좋지만 선행되어야 할 한 가지, 아이들처럼 순수하고 선한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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